동경 이경순 선생
시인
동기 이경순은 1905년 11월 11일 진주 명석면 외율리에서 태어나 평생 진주만을 지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인의 정신과 예술혼이 각별했던 진주의 시인이며, 동기 이경순을 후배 문인들은 흔히 [아나키스트] 시인이라 부른다. 청년 시절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의 사상 단체인 [연맹]에 가입해 아나키스트 시인들과 어울렸다.
나라 잃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시인으로서 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청년시절 사상운동은 시인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국권상실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일체의 정치 권력을 부정하는무정부의식과 통하게 되었으며, 이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24년 일본 동경 사립 주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대학 전문학부 경제과 중퇴, 1942년 일본포 화시 경북의과의전 졸업 등의 학력에서 보듯이 당시 엘리트로서 편안한 길을 갈 수가 있었지만 시인은 문학의 길을 선택해 꿈을 실현시키고자했던 것이다.
동기 이경순은 예술을 ‘예술을 위한 예술’ 만으로 보지 않고, 소속한 사회나 민족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반항을 택한 것이다.
동기 이경순은 해방 후 진주에 정착해 진주문단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1946년 설창수 유치진 등과 함께 [진주 시인협회]를 창립하고, 지방 문예지의 효시인 詩 동인지인 [등불]동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47년 동인지 [등불]에 [여인에게]를발표, 1928년 경향신문 []에 이어 1948년 [영남문학]에 [] 등을 발표하여 사실상 문단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1949년 [백민 17집]에 []이란 작품으로 정식 등단했다.
동기 이경순은 1929년 우리나라 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창제자로 참여한것을 비롯해 1964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으셨고, 남해 창선 중 ·고등학교장, 진주상고 교장, 한국문협 진주지부장, 한국예총 진주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계와 문화예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스스로 돈키호테를 닮고자 호를 []로 지었다.
“해방 이듬해 월북 작가인 송영의 [황혼]을 진주극장에서 상영할 때 이병주씨가 연출하고 내가 [동기]라는 별칭으로 출연해 그때부터 호칭이 필명으로 됐다”고 했다.
동기 이경순은 1983년 비봉산을 오르다가 다리를다쳐 병석에 들어 투병 끝에 1985년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돈키호테] [ 고고한 학] [교육자] [아나키스트] 등~~의 단어들이풍기는 시인의 모습은 암울했던 시대의 울분을 삭이며 평생 시대조류를 거슬러 올라간 가난한 시골 선비가 연상된다.
[~~~~]는 1987년 평소 그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이덕 시인에 의해 발의가 되어 서정 주, 최재호, 김윤양, 이명길씨 등이 중심이 되어 2년만인 1989년 평소 그가 자주 거닐던 남강 가에 세워졌다.
~~에는 시인의 시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 [저 언덕]이 새겨져 있다.